대구가 낳은 ‘조선 천재’ 이인성

시간이 무시한 38세 젊은 화가…”누가 천재를 쐈는가?”

(어쨌든 주말 –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현실 너머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한 예술가
대구 출신 조선 천재 이인성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팀장

이인성, “경주의 산에서”, 1935년 개인소장. 조선미술전람회 최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푸른 하늘과 붉은 땅으로 대표되는 ‘고향’ 경주의 모습을 담아냈다.

이인성이 23세의 일본유학시절에 그린 걸작이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아들 기정(1912∼2002) 선생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베를린 거리를 질주했지만 손기정의 화려한 활약은 식민지 애도에 찬 조선인민의 자부심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손기정과 같은 해에 태어나 손기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명인사로서 두각을 나타낸 천재 화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인성(1912-1950)이다.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말이다.

“한국인을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이 세 명의 한국인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라톤의 손기정, 댄스의 최승희, 그림의 이인성!
” 음, 그런데 이상하네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들 기정과 최승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인성은 왜 우리 사회에서 거의 잊혀졌을까?

◇스승을 넘어선 제자

이인성은 1912년 대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좋은 직업이 없었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식당을 운영했습니다.

공립 수창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더 이상 가족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이인성은 타고난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그의 예능을 주체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에서 만점을 받고 주위 사람들의 칭찬에 격려를 받아 스스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지식인이라면 감천이라고 하라. 초등학교 5학년 때 이인성은 이날 대구의 한 교회에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화가 서동진의 눈길을 끌었다.

서동진(1900-1970)은 대구에 서양화 재료를 최초로 도입한 화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상정(1896-1947)의 계성학교 학생이었다.

스승의 영향으로 이른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실제로 미술을 공부했다.

귀국 후 1927년 대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14년 동안 구 대련고 교암학교에서 무보수로 일하며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서동진은 이인성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인쇄소이자 화가의 아지트인 대구미술사에 취직했다.

이인성은 이곳에서 일하고 먹고 공부할 수 있었다.


1927년 대구의 화단 ‘영화회’ 창립 기념사진. 맨 앞줄 이인성(왼쪽). 이 사진은 10대 이인성이 서동진, 이상화(이상정의 동생, 시인), 김용준 등 선배들과 함께 작업한 모습이다.

이인성의 아버지가 몽둥이를 가져와 그림을 그린다고 혼내는 대신, 서동진은 진정한 스승이자 은인으로 직접 아버지 역할까지 톡톡히 해냈다.

이인성이 1929년 17세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처음 참가했을 때 서동진은 기자회견에서 제자 이인성의 수상이 자신보다 더 괄목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불과 2년 후인 1931년 이인성은 스승을 제치고 선전선동 특별상을 수상했다.

그 해 일괄 특별전형을 수상한 작가가 나혜석 같은 덩치 큰 선배였으니 정말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서동진은 자기보다 먼저 온 제자를 질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대구 귀족들의 권력을 장악하고 대구 일본인들의 협조까지 얻어 자신을 능가했던 제자가 이제 그를 떠나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인성은 경북 여고생 시라가 주키치 교장의 중재로 ‘대구미술사’에서처럼 일본 도쿄의 킹크레용사(오사마상사)에서 일하고 공부할 수 있었다.

‘. 1931년 선전을 위한 특별선거를 받자마자 몇 초 만에 이뤄졌다.


이인성, 1930년대 초반 일본유학시 킹크레용사 작업실, 개인소장

◇ ‘찬란한 조선소년’

이인성이 도쿄로 날아갔다.

킹크레용컴퍼니는 크레용과 물감을 제조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이인성은 스튜디오에서 회사에서 제공하는 그림 도구를 자유롭게 활용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며 틈틈이 회사 작업실에서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유학이라기보다는 이 무렵 이미 조선과 일본 화단 이전부터 화가로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매년 이인성은 일본산 그림을 심천으로 보내 조선 미술계에서 인정받은 최고의 전시회로 특별선정과 최우수상을 거듭 수상했다.

“이인성에 대한 선전이 있느냐”는 말이 나오곤 했는데, 이 시기에 ‘가을날’, ‘경주 어느 산골짜기에서’ 등 이인성의 대표작이 나왔다.

낭만과 허무가 공존하는 조선의 ‘고향’에 다양한 상징과 은유를 더해 탄생한 명작들이었다.

1930년대 조선에 이렇게 대담한 유화를 그릴 수 있는 화가가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인성, “가을날”, 1934, 개인소장

그게 다가 아닙니다.

이인성은 도쿄로 건너간 지 1년 만에 일본 최고의 전시회인 제전(제전)에 즉석에서 입선했다.

그는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의 천재소년’으로 소개되고 그의 인터뷰가 실렸다.

일본 유명 예술가들이 크레용왕 회장에게 축하 엽서를 보냈다.

무엇보다 이인성의 수채화 솜씨는 대구 때부터 갈고닦아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1935년 일본수채화전이 열렸을 때 이인성은 모든 일본 화가를 제치고 당당히 대상을 수상했다.

일본인도 인정하는 한국 화가의 ‘계급’이었다.

◇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는 화가

당시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 ‘아리랑고개’는 그대로 보존됐다.

이 작품은 유학 중 잠시 조선에 왔을 때 그린 것으로, 서울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아리랑고개’를 건너는 모습을 그린 풍경화였다.

원래 이곳은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의 실제 촬영지가 되어서 ‘아리랑고개’라 불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광인 영진(나운규 분)은 악랄한 지주의 하인이자 간첩인 기호(주인규 분)를 죽이기 위해 밧줄에 묶여 일본 경찰과 함께, ‘아리랑’ 노래가 나올 때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였다.

이인성은 이 영화가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이인성 역시 당시 조선 민족의 대표로서 ‘억울함’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인성은 영화 ‘아리랑’을 오마주하듯 ‘아리랑고개’를 그려 작품의 내막조차 모르는 일본인들을 위해 전시회에 당당히 전시해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인성, “아리랑고개”, 1934, 개인소장.

이인성의 풍경화와 실제 장소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놀라움이 두 배로 될 것이다.

처음에는 실제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운지 놀라고,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뛰어난 ‘연출’에 놀란다.

그는 온갖 밝은 색과 자유로운 선을 동원하여 평범할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을 매우 매력적인 ‘다른 세계’로 탈바꿈시켰다.

때론 슬프게, 때론 눈부시게 아름답게, 세상이 작품 속에 펼쳐진다.

그리고 그러한 ‘창작’을 가능케 하는 화가가 진정으로 위대한 존재라는 자부심이 이인성의 마음을 지배했다.

그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첫째 부인이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뜨자 이인성은 첫째 딸 애향의 이화중 입학을 도왔다.

이인성은 엄마 없는 딸을 위해 직접 교복을 만들었는데 딸이 나중에 찾아보니 원래 있던 블랙 플리츠 스커트 대신 핑크와 퍼플의 더블 컬러 조합으로 스커트를 만들었다.

왜 이렇게 하느냐는 질문에 이인성은 “색깔이 예쁜데 여자애들이 검은색을 입게 한다”며 학교가 문제라고 소리쳤다.

이인성은 본능적으로 세상의 규칙과 통제를 거부하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그 외에는 말할 수 없이 침착했지만, 술을 마시다 무거운 주사를 맞았다는 게 언뜻 이해가 간다.

그의 대표 샷은 느닷없이 일본 경찰과 부딪혀 말다툼을 벌이는 것이었다.

지나친 통제를 견디지 ​​못하고 현실 너머의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유를 꿈꾸던 타고난 예술가였다.


이인성, “노란옷의 여인”, 1936년경, 대구미술관. 패션 디자이너였던 그의 첫 부인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故 이건희 회장의 유족이 이인성 회장의 고향인 대구에 기증했다.

◇”누가 천재를 쐈어?”

현실 세계와 다른 세계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던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때는 1950년 11월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경찰도 군인도 아닌 보안군이 제자리에서 도시를 휘젓고 다니던 때였다.

서울 북가현동에 살던 이인성은 술을 마시다 경찰관과 말다툼을 했다.

늦은 시간도 아닌데 자꾸 술 끊고 집에 가라고 귀찮게 하는 식구들에게 “너는 내가 누군지 모르잖아. 나는 이인성이다”라고 감탄했다.

워낙 자신만만한 이인성에 제작진은 이인성을 고위층일지도 모른다며 손을 뗐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에게 이인성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권력과는 거리가 먼 화가였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경비원들은 이인성의 집으로 찾아가 “논쟁에 대해”라는 생각으로 이인성의 집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공탄 사격은 결국 이인성의 머리에 명중했다.

“실수야!
” 승무원은 말없이 떠났다.

무방비한 이인성은 다음날 어린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는 38세였습니다.

이후 소설가 최인호는 이인성의 억울한 죽음에 절규에 가까운 글을 쏟아냈다.

“누가 천재를 쐈어?” “천재 예술가는 신만이 낳는다.

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을 죽여야 합니까?”, “왜 그들은 (훌륭한 예술가를) 우리 옆에 살게 두지 않습니까?”


이인성, “모자를 쓴 자화상”, 1950, 개인소장. 이인성의 자화상은 늘 눈을 감고 있다.

친구 말에 따르면 세상 보기 싫어 일부러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인성이 촬영된 같은 해에 제작됐다.

◇이인성은 억울하다

이인성을 죽인 사람은 전쟁 당시 보안군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이인성의 본명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화가에 대한 존경심이 그때보다 지금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릅니다.

세계 곳곳에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뛰어난 예술가의 탄생과 성장은 세상에서 더 어렵고 소중한 일인데…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인성에 대한 사후 미술계와 학계의 평가가 너무 가혹했다는 것입니다.

비판의 주된 이유는 그가 주로 일본 총독부에서 운영하는 관객 연극인 “선전”이나 일본의 “축제”에서 활동했지만 그게 무엇입니까? 이 가난한 화가가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 시스템이었습니다.

그것밖에 없는 식민시대를 탓해야 할 텐데 왜 우리는 구조를 넘어 개인이 생존하기를 기대하는가? 살아남지도 못하고 죽은 화가에게. 일장기를 달고 달려온 손기정과 ‘사이쇼키’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누비던 최승희도 어쩔 수 없었다.

불공평합니다.

마치 이인성의 원한이 이어진 것처럼 억울하다.


이인성, “당당화”, 1944, 개인소장. 한용운의 시 『해당화』의 내용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해석한다.

철없는 것을 모르는 아이들이 달콤한 꽃이 피었기 때문에 봄이 왔다고 기뻐하지만, 아직 진짜 봄이 오지 않아서 아찔하게 봄을 기다리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아요. 파랗던 1944년에 이런 작품을 그려 자랑스럽게 프로파간다에 제출했다는 사실이 놀랍다.